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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리 구계등의 두가지 이야기

그 서풍 2015. 8. 4. 11:27

 

* 첫 번째 이야기

완도읍 정도리 구계등, 100미터 길이 800미터에 이르는 해변에 7월의 태양이 눈이 시리게 빛난다.

이곳은 해변의 백사장이라는 보통의 상식을 단연코 거부하는 곳이다.

보길도의 예송리처럼 모래 반에 주먹만 한 몽돌이 반의 비율까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야멸차게 모래가 없다.

 

그렇다면 바닷가 특유의 낭만까지 없다는 말인가?’ 하고 지레짐작을 할 것이다. 아니다.

퀴퀴한 냄새에 하루 종일 갇혀있는 두 발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갯돌 위를 사뿐히 걸어보라.

돌 표면의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따끈한 복사열이 예민한 발바닥에 전달되어 상큼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마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성급하게 입 안에 넣었을 때의 긴장감 같은 것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모래찜질은 할 수 없잖아?’

동행한 자매들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갯돌 위에 벌렁 눕지 않은가.

한 손에 양산을 펼쳐 든 채로...

그 모습이 자기 집 침대 위에 눕는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이만하면 훌륭한 자연 돌 찜질이 아닌가!

한 번의 동요도 없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고 보기에 좋았다.

그 맛과 멋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맘씨 좋은 이웃 아저씨의 얼굴처럼 둥글넓적하게 생긴 갯돌(청환석) 밭은 원만함의 천지였다.

수천 년 인고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상우로에 씻기고 파도에 깎여 다듬어진 후덕함인가!

바라볼수록 모난데 없이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배어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청환석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스님들의 머리라고 한다.

이승에서의 미진한 세속의 때를 마저 씻으려 함이런가.

한편으로 정도리는 정화의 도장인 셈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 청환석靑丸石의 세계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뭍에 가까울수록 수박만한 크기에서 중간으로 갈수록 참외만 해지고 다시 주먹만 해지다가 물밑 녘에 이르러서는 계란만 해지는데

이렇게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아홉 개의 계단을 펼쳐 놓은 것 같다하여 '구계등'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내 눈에는 아홉 계단은커녕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만만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한계이니 부디 탓하지 마시라.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는 몽돌 밭에서 아홉 개의 이랑을 발견해 낸 선인들의 열린 시선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왔다가 물러날 때에 갯돌의 크기와 파도의 강약에 따라 백가지 소리를 빚어낸다고 하여 백색음百色音이라

부른다고 하지않은가.

 

/ 정도리 구계등 해안에 번지는 노을, 관련 사이트 인용

 

* 두 번째 이야기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1996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의 주요 배경은 정도리 구계등 해안이.

주인공이 외숙모의 부음을 듣고 문상하러 가는 길에 광주 버스 터미널에서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기이한 인연의 끈에 이끌리듯이 그녀를 따라 완도행 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리고 마침내 정도리 구계등에 이른다.

 

천지간天地間에 사람이 하나 들고 나는 데 무슨 자취가 있을까?”라는 물음의 바탕에는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이 세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생명이야 말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음이다.

죽음을 결심한 한 여인을 회생의 길로 인도하는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정도리 구계등인 것이다.

 

오랜만에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일상의 먼지를 씻어내고자 했던 일말의 바람 뒤의,

정도리 구계등과의 만남, 그리고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의 조우로 삶이 더욱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구름에 달 가듯이 홀연히 구계등을 찾아 맨발로 몽돌 밟기를 하고

잠깐 마음을 추스르고 앉아 ‘차르륵 사르륵백가지 해조음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강추해 드린다.

더불어 소설 천지간도 중편에 불과하니 불친님들께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올 여름 피서로 구계등의 두 가지 이야기가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