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을 찾아
"깊은 산골의 한 떨기 꽃은 저 홀로 피어나지만 그 고고한 향기는 계곡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다산초당을 찾아 만덕산(萬德山) 기슭을 오르며 나는 어느 명상집에서 읽은 이 구절을 줄 곳
음미하며 화두를 삼았다.
그 "고고한 향기’가 다산선생이 이 곳 동암(東菴)에 머물던 1813년 7월에 지은 ‘매화와 새’라는
사언율시(四言律詩)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을 줄이야...
편편비조(翩翩飛鳥) 식아정매(息我庭梅)
유열기방(有烈其芳) 혜연기래(惠然其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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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았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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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 골짜기를 찾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다 이 '고고한 향기' 때문임
에랴.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을 저술한 학자라는 정도의 선입견으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떤 이는 개혁을 꿈꾼 사상가에 경륜가, 실학자라 칭하고 어떤 이는 종두법을 알린 의학자,
거중기를 설계한 공학자라 칭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권철신, 이벽 등과 함께 천주학을 했던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에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것인가!
이는 다산이라는 그릇이 너무 크고 넓어서 아무리 퍼내려 애써도 그것은 한낱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한탄한 표현이리라.
기념관에서 초당에 이르는 길은 안내판에 따르면 800미터, 초입을 따라 새로이 두충나무를 심어
순례객을 인도하려는 의도가 어딘지 가상하기만 하다.
이어지는 길은 여느 시골길처럼 평범하여 지루한 느낌이 든다.
도중에 다산초당 안내도를 지나고 나서는 제법 경사가 지기 시작하고 세월의 물줄기에 씻긴 굴곡진
암반들과 뿌리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발걸음을 재촉한다.
골짜기에 흐르는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에 손을 적시니 전해지는 냉기로 보아 계곡과 숲이
깊고 울창함을 알 수 있다.
층층이 쌓은 돌계단을 따라 몇 굽이돌아 주위의 늘어 선 소나무, 대나무들의 그늘이 점점 짙어지는가
싶더니 바로 서암(西庵)이 수풀사이로 모습을 들어낸다.
다산의 제자들이 기거한 곳이다.
서암을 지나 초당 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맞은편에 제법 크고 널찍한 입석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丁石” 두 글자가 낯익은 해서체로 깊고 힘 있게 음각이 되어 있다.
선생이 여기 머물던 시절 손수 쓰고 새기셨다고 한다.
앞을 가로막는 육중한 암벽을 바르게 다듬어 바느질하듯 한 땀 한 땀 새기며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래셨을
것이다.
초당의 서쪽 처마 끝에 드리운 듯 매달려 있던 햇살이 어느덧 기울기 시작한다.
면벽을 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선생의 얼굴에 법열처럼 엷은 미소가 번진다.
이윽고 망치와 정을 집어 든다.
"깡 깡" 정을 때리는 망치 소리가 초당을 한 바퀴 휘돌아 쏜살같이 허공으로 내 닫는다.
"까아앙! 까아아앙!"
정석을 살피고 초당으로 내려와 뒤쪽으로 들어서면 바위틈 이끼사이로 방울지어 내리는 석간수를 만난다.
약천(藥泉)이다.
1808년 봄, 선생이 직접파서 만든 샘으로 이 물로 차를 달여 드시며 저술로 침침해진 눈과 피곤한 몸을
추스르셨다고 한다.
연지는, 산속의 물을 나무로 만든 긴 홈통으로 길을 내어 장방형의 소담한 못으로 떨어지도록 작은 폭포를
만들고 잉어를 기르던 곳이다.
탐진강에서 돌을 주어다 한 가운데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선인들의 여유로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동암(東庵)은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10년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을 저술한 산실이다.
선생이 생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긴 세월을 이곳 초야에 묻혀 일구월심, 유배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과연
이 방대한 저술을 후세에 길이 남길 수 있었을까?
베트남 통일의 영웅 호치민이 책상 앞에 펴 놓고 치세의 교본으로 삼았다는 목민심서의 일화는 감동을
전해 준다.
원래 초당이었던 이곳을 다산 유족보존회가 1958년 새로 건립하면서 기와를 올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다산초당은 남향으로, 고증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차치하더라도
주변의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 어두울 정도로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러한 순례자의 선입견을, “아,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단숨에 허물어뜨리는
풍광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동암을 지나 한 모퉁이 돌아서니 저 멀리 강진만의 드넓은 구강포가 해풍에 씻기운 듯이 활짝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선생은 이곳 한 자리에서 발돋움하고 거침없이 탁 트인 바다를 굽어보며 저술과 양학(養學)으로 지친
심기를 북 돋우고, 때로는 향수에 젖으셨을 것이다.
목을 길게 빼고 송림의 벌판 너머 구강포를 조망하기 좋은 곳에 마침 정자 천일각이 우뚝 서 있다.
선인들의 발자국을 따라 한 줄기 바람처럼 찾아 나선 다산초당, 돌아오는 가을쯤에 다시 이곳을 찾아
숨겨진 역사의 뒤안길을 호젓이 거닐고 싶다.
천일각에 올라 구강 포구로부터 갯내음을 품고 올라오는 솔바람에 마냥 젖고 싶다.
다산 정약용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