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입술 나주 수목원에서 두 개의 입술 조 원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고 싶을 때 나무가 바람에게 말하고 싶을 때 서로의 입술을 포갠다 바람은 푸르고 멍든 잎사귀에 혀를 들이 밀고 침 발라 새긴 말들을 핥아준다 때로는 울음도 문장이다 바람의 눈물을 받아 적느라 나무는 가지를 뻗어 하늘 맨 .. 나의 애송시 2018.11.03
시법 詩法 각화동 시화마을에서 시법詩法 아치볼드 매클리시(미, 1892~1982) 시는 만질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둥근 과일처럼 엄지에 닿은 오래된 메달처럼 단단하고 날아가는 새처럼 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시는 같지만 진실된 것이 아니다 슬픈 이야기를 표현하려면 텅 빈 문과 단풍잎 하나 사랑을 .. 나의 애송시 2018.09.19
능소화 능소화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 버리는 사랑은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 나의 애송시 2018.08.22
성탄제 / 김종길 구례 산수유 마을에서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 나의 애송시 2017.12.25
떠나가는 배 / 용아 박용철 외투를 벗고 산책 나온 용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용아 생가에서 떠나가는 배 용아 박용철 (1904~1938)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 나의 애송시 2017.10.06
자화상 / 서정주 2015년 미당문학제, 미당문학관에서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이라.. 나의 애송시 2017.06.22
서풍부 / 김춘수 황산 투어, 화산 미굴 가는 도중에 촬영 서풍부西風賦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 나의 애송시 2017.04.10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2.2 * 151.6cm, 캔버스에 유채, 1911년 작,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러시아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샤갈은 "나의 고향은 암소처럼 다가온다." 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샤갈의 고향에 김춘수 시인은 3월에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눈을 포근하.. 나의 애송시 2017.03.08
사평역에서 / 곽재구 군산의 간이역 임피역에서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 나의 애송시 2017.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