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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綠雨堂)에 가다.

그 서풍 2014. 8. 23. 17:27

 

            녹색비가 내리는 집 - 이름에서 부터 예사롭지 않은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이 집을 터로 삼은 이의 인품을 미리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발걸음이 즐겁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孤山 尹善道 遺蹟 地)라고 새긴 입석이 마을 입구에서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새롭게 조성한 듯 한 연지(蓮池) 옆 고목아래 자리를 잡았다.

            불어오는 바람결이 여느 곳과 달리 상쾌하기만 하다.

 

            장방형과 원형의 섬 주위에는 수련이 군락을 이루고 한 무리 소금장이 가족이 무리지어 헤엄을 친다.

            주변의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소나무의 기세가 한 눈에도 연륜이 쌓이고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해남읍 연동리 덕음산(德陰山) 자락의 녹우당(綠雨堂: 해남 윤문 종가)과 기념 박물관에는 한 가문의 살아 숨 쉬는

            끈끈한 생명력과 흔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오우가(五友歌)가 수록되어 있는 산중신곡(山中新曲)이며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고산의 증손인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의 초정고목도와 국보 제240호로 유명한 자화상이 소장되어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갈색의 눈동자, 윤곽이 뚜렷한 얼굴,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그린 수염 등 사실적으로 묘사한

            필치가 놀랍기만 하다.

            실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며 그렸다는 동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공제의 시, , (詩 書 畵), 고산자 김정호보다 150여년 전에 그렸다는 동국여지지도(東國與地之圖)는 선생의

            천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택에는 반드시 인고의 세월을 함께 지켜 온 동반자가 자리 하는 법이다.

            수령 500, 높이 20미터, 둘레 5.8미터인 은행나무가 입구에그 위용을 자랑하며 마치 녹우당의 든든한 수호신처럼

            지켜보고 있다.

            서 너 걸음 뒤로 물러서 살펴보니 이처럼 거대한 밑동에 비해 그 줄기나 가지가 무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줄기와 가지가 지나치면 풍상우로(風霜雨露)에 취약하다는 이치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터득했으리라.

            수령에 비해 어느 곳 하나 상한데 없이 줄기와 가지가 실하여 많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두 갈래진 은행나무 잎을 처음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

             “잎이 하나이면서 둘인가, 둘이면서 하나인가?

            아! 사랑은 모름지기 저러해야 하는 것을!

 

            녹우당에서 추원당(追遠堂)에 이르는 오솔길 좌우에는 쌓인 연륜만큼이나 울창하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숲이

            우거져 호젓하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한 낮에도 고즈넉한 기품이 서리고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숲속에 한 여름의 정취가 그득하다.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 숲을 향해 오르다가 부리부리한 눈매,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를 지닌 한 시골

            사내를 만났다.

            그는 손짓을 하며 자상하게 묻는 말에 대답을 한다.

            헤어져 돌아서며 문득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쓰고 있는 모자를 두건으로 바꾸고 턱이며 입술에

            수염을 붙이면 자화상의 얼굴과 흡사할 것 같다.

 

            수령300, 높이 24미터, 둘레3.4미터의 해송이 마치 녹우당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서 순례자와 일행을

            그윽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그 그늘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새삼스레 우리네 삶의 의미를 반추해 본다.

            고작 한 세기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한 오백년 쯤 살 것처럼 온갖 근심과 번민의 짐을 짊어지고 질곡의 골짜

            기를 걸어가는 우리네 삶의 어리석음이여....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한 선인의 말이 더욱 절박하게 닥아 온다.

 

            제 철을 만난 매미며 쓰르라미의 합창이 마치 소나기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하다.

            바로 뒤 비자나무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등이 어우러진 전원 교향악이 심란한 나그네의 마음을 한껏

            추스른다.

 

            녹우당, 한 가문이 간직한 유, 무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연륜이란 단순하게 세월만 흐른다고 쌓이는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세월의 흐름이 역사의 이끼 되어 켜켜이 쌓여 있는 이 고택에 때가 되면 내리는 녹색비가 그 연륜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고 있음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