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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원靑丘園 뜰을 거닐며

그 서풍 2015. 5. 30. 15:50

 

문학관 마당에 복원이 된 청구원靑丘園에 막바지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석정夕汀 문학관에서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중략)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부분

 

지역문화교류 호남재단에서 주최한 부안 인문학 여행길에 석정 문학관을 찾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큰 행운이었다.

마침내 신석정 시인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산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중딩시절 그 먼 나라를 두런두런 읽으며 어머니가 계시는 그곳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였다.

당신 없이 자란 나는 초원처럼 펼쳐진 너른 들녘을 발견하고 한 마리 염소새끼마냥 전율하였다.

당신은 소심하고 파리하여 유난히 병적인 소년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불쑥 가슴을 내밀어 자양분을 맘껏 들이킬 수 있게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을 찾아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배고픔에,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랬더니라.

'그 먼 나라의 모태인 청구원을 찾아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얼굴을 붉히며 들춰보게 될 줄이야.

(이 시는 1939년 선생이 34세 되던 해 이곳 청구원에서 발표한 첫 시집 촛불에 수록되어 있다.)

 

 

일림一林

촛불을 꺼라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어서 우리 침실로 맞아 와야지....

 

일림아

문을 열어 제치고 들창도 추켜올려라

너와 내가 턱을 고이고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너와 내가 사랑하는 난초는 푸른 달빛을 조용히 호흡하겠지....

 

일림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작은 배를 잡아타고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 ‘푸른 침실부분

 

어디선가 딸을 부르는 시인의 음성이 낭랑하게 들리는 듯 청구원의 생활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시인은 울타리를 이룬 시누대, 은행나무, 산수유, 벽오동그늘아래 조촐하게 놓인 의자에서 손님을 맞고 몇 안 되는

농사를 주경야독으로 자족하며 가족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만경의 넓은 들, 내소사를 안은 능가산, 너른 서해 바다까지 아우른 청구원은 첫 시집 [촛불]과 둘째 시집 [슬픈 목가]를 잉태한

기름진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시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만난 석정시인은 시인의 지조를 올곧게 지키신 분이다.

일제치하에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고 격랑의 시대에 중앙문단을 떠나 시류에도 흔들리지 않은 꿋꿋함을 지니셨다.

훤칠한 풍채처럼 굵직하게 사신 분, 삶이 곧 시가 되어 사신 분 신석정.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당신의 좌우명처럼 살다 가신 이런 시인이 우리 곁에 계신 것은 후대들에게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이다.

줄 곳 향리를 지키며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 주신 불변의 스승이시다. 

 

                                                             

                                                            선생의 손 떼 묻은 가구와 책장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대춘부부분

 

갈수록 팍팍한 상실의 시대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석정夕汀선생님은

그럼에도 우리는 쌓이고 모여 끼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고 굵직한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선생님의 시에는 하나같이 바람결에 두런두런 얘기소리가 실려 있다.

선생님의 시에는 어김없이 바람결에 어머니의 냄새, 고향의 냄새가 배어 있다.

문학관에 들려 찜해온 작은 시집에서 들려주실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와 고향의 냄새에 심취해 보리라.

그래도 허기가 풀리지 않으면 홀연히 청구원 뜰을 다시 찾아 땅거미 질 때까지 거닐어 보리라.

 

  https://youtu.be/bDKdiwkMoEk  :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 낭송 탈렌트 김미숙